종종 80-90년대 학창 시절의 교과서나 노트를 꺼내 보며 '그때는 참 순수했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그 시절의 나의 발상에 놀라기도 하면서 왠지 낯간지러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의 내게서 잊혀진 과거의 편린을 접하는 것은 여러 가지 사유와 감정을 동반하며 그 시간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현재로 돌아와 지금의 내가 되면, 변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고, 변해버린 세상을 보며 격세지감에 아찔해진다. 그렇게 변해버린 세상과 변해버린 나. 동시에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지금은 흔해빠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창작물 안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혹은 단순히 살아가기 위해 주변의 넘쳐나는 위험 요소들을 배제하는 장면들은 낯설지 않다.
예를 들어, 좀비영화나 재난영화에서안전한 장소, 안전한 음식, 안전한 시간을 영위하기 위해 좀비를 비롯한 각종 위험 요소들을 없애고 환경을 개발하는 장면들 말이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고 싶은 1954년 리처드 매드슨이 발표한 대작 소설 '나는 전설이다.' 또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이가 뱀파이어로 변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홀로 인간으로 남은 주인공 네빌. 그는 밤 시간 동안 자신의 거처로 몰려오는 뱀파이어들에 대항하여 공성하다가,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자신의 거처를 기반으로 주변 지역의 뱀파이어들을 찾아다니며 가슴에 말뚝을 박아, 하나 둘씩 죽여 나간다. 그러나 여기 단 하나.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점이 존재하며 이 점으로 말미암아 이 소설의 결론이 결정지어지고 끝없는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그 뱀파이어들이 '생각하는-그러므로 사회적인-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결국 뱀파이어들에게 사로잡힌 네빌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뱀파이어들을 보게 된다. 인간의 세상에서 무력한 밤 시간 동안 인간을 잡아먹는 뱀파이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듯이, 뱀파이어라는 신인류들의 세상에서 그들이 무력한 낮 시간 동안 그들을 죽이며 다니던 자기 자신이 완벽하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변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사실 다르지 않다는 것과 오히려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의 위상이 변하였다는 것을 인식하며 외친다. '나는 전설이다.'라고.
이 소설을 읽어 본 사람들은 윌 스미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명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영화의 세계관에서는 뱀파이어를 좀비로 바꾸면서 그들의 지성을 앗아갔으며, 그러므로 주인공이 전설이 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인간 실존의 영역과 그 반대편에 있는 사회 및 공동체의 영역을 넘나들다가, 종국에는 그 모든 것을 그러모아 터트리며 거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 대작은 이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또한 충분히 넘치도록 유효한 사유를 제공한다. 세상도 개인도 급변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이다.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가치와 사상들이 세계화라는 물결 속에 파도처럼 휩쓸려 나가고 진리라 여겨졌던 각종 이론들은 나오기가 무섭게 그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이전 같으면 수 세기는 지나야 이루어졌을 변화가 불과 10년, 아니 2-3년 만에도 이루어져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음은 그 자체로 스스로의 위상을 변화시키는 모순을 가진다. 그리고 그 모순은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개개인에게 어서 세상의 흐름에 따르라고 재촉한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변해가는 시간 속에서 안정할 수 있는 기준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신인류가 되어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도태되어 전설이 될 것인가? 나 자신에게서도 사회에서도 그 기준을 찾을 수가 없다면 우리는 어디서 그러한 기준을 찾아야 할 것인가?
난 기본적으로 술을 싫어하고 커피를 좋아하는데, 주변에 보면 꼭 반대인 사람들이 있다. 난 여름에 큰 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한 네 모금이면 다 먹을 수 있는데 소주는 14번에 나눠서 핥아먹는 것처럼, 술은 항상 원샷으로 마시면서도 커피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반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술을 좋아하는 동시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커피를 마실 때 자기도 같이 뭐라도 시켜서 앉아 있지만 커피에 대해 잘 모르니 입을 닫고 있거나 괜히 카페인이 안 들어간 다른 음료를 시켜서 또 조용히 앉아있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커피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알려주고 그에 대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이 포스팅의 목적이다. 이 글이 인기가 좀 있거나 심심하면 중급자, 고급자 코스도 써 볼 예정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초보자
커피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싶다면 이탈리아를 좀 아는게 좋다. 커피 용어가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 용어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포르테 스타카토 같은 것들) 우리나라 사람들이 김치에 자부심을 가지듯이 이탈리아인들은 커피에 자부심을 가진다. 사실 이탈리안들이 커피를 처음 발견하고 마시기 시작한 건 아닌데, 에스프레소를 현재의 형태로 고정시키고 발전시킨 것이 이탈리아다. 현재 전 세계 사람들이 카페에서 주문하고 마시는 대다수 형태의 커피는 이 에스프레소 기반이다. 여러분이 커피가게에 가서 볼 수 있는 커피 중 더치류와 드립류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커피가 이탈리아 '카페'에서 파생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메리카노는 그 에스프레소를 그냥 물에 섞은 거다.
그래서 기본적인 커피 이름은 다 이탈리아어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카페라떼, 카페모카, 마끼아또, 아포가토, 꼰빠냐
우리나라로 치면 배추김치, 총각김치, 오이소박이, 갓김치, 깍두기 등과 마찬가지란 소리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이 '김치'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무엇을 떠올리는가? 단연코 배추김치다. 가장 기본이 되는 그것을 우리는 그냥 김치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인들에게 그렇게 기본이 되는 것이 에스프레소다. 그래서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에서 그냥 커피를 주문하면 에스프레소가 나온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탈리아인은 커피(coffee)라고 말하지 않고 카페(caffe)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커피라고 읽는 건 원래 몇몇 천박한 놈들(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 뿐이었다.
이탈리아인들이 커피에 가지는 자부심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김치와 맞먹는다고 말했는데, 여기에 비슷한 비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기무치'다.
한 20년쯤 전에 일본에서 김치를 자기들 음식이라고 주장했다가 전 국민이 개빡친적이 있었다. 그래서 기무치따위를 어디 감히 김치에 비비냐고 어마어마한 분노를 쏟아내고 남의 문화를 훔쳐가는 이에 대한 경멸을 토해냈었는데, 이와 완벽히 같은 포지션에 위치하는 것이 있다.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이 매일 마시고 있는 바로 그 커피. '아메리카노'다
아메리카노가 무슨 뜻일까? 딱 봐도 견적이 나오지 않는가? 우리가 아는 단어 중에 저것과 가장 유사한 의미와 용법을 가진 단어가 있는데 바로 '조센징'이다. 조센징은 일본어로 단순히 '조선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 말을 듣는 순간 분노가 치미는데, 저 말에 혐오와 경멸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노'도 마찬가지의 의미로 쓰인다. ‘아메리카노’는 말 그대로 ‘미국인’이라는 뜻이다. 해외에서 어쩌다 말을 트게 되었던 이탈리아인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천박하고 근본 없는 미국 놈들이나 좋다고 마시는 구정물이란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메리카노'다. (이에 대한 유래는 중급자 코스에서 이야기해 주겠다.)
우리나라에 스타벅스가 들어온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사실 스타벅스에 '아메리카노'라는 메뉴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저게 멸칭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스타벅스 메뉴판에서 지금의 아메리카노의 위치에 있는 것의 이름은 그냥 '커피(coffee)'였다. 이탈리아인에게 그냥 '카페'가 에스프레소인 것처럼, 미국인들에게 그냥 '커피'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메리카노라는 말이다. 이걸 이탈리아인들이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까? 감히 카페에 물을 섞어 마신다고? 뿐만 아니라 '카페'도 아니고 '커피'라고 부른다고? 한국인이 기무치를 들었을 때와 완벽히 같은 종류의 분노와 경멸을 담고 있는 말이 '아메리카노'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도 기무치를 보면 '일본인'이라고 말해보자.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메뉴가 변경된 상태다. 대한민국 만세
오늘의 커피 단어
카페 : 커피 카페테리아 : 커피가게 (‘~리아’는 보통 ‘~’를 파는 가게를 뜻한다) * 유사 용법 1. 핏제리아 : 피자가게 2. 롯데리아 : 롯데 가게(그래서 롯데리아는 롯데를 팔지, 햄버거를 팔지 않는다.) 라떼 : 우유 카페라떼 : 우유 커피(서 양놈 들은 중요한 단어가 앞에 붙기 때문에 '커피우유'가 아니라 '우유 커피'다) 카푸치노 : 카푸친 사람(가톨릭 남자 수도회. 수도복 색이 이와 같아서 붙였다.) 마끼아또 : 마끼아레의 분사형으로 '얼룩진'이란 의미다.(젖소의 얼룩무늬처럼 까만 커피에 우유를 부어 얼룩지게 만들어서 붙은 이름이다.) 아포가또 : 아포가레의 분사형으로 '끼얹은'이란 의미다.(아이스크림에 카페, 즉 에스프레소를 끼얹어/부어 먹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꼰빠냐 : con(with) + panna(생크림) = 꼰빤나. 생크림과 함께, 생크림을 얹어주는 커피
멀쩡한 정품 바디캡에 구멍을 뚫기가 좀 껄끄럽고, 무엇보다 난 저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전동 드릴이 없다.
그럼 바디캡에 구멍을 뚫기 위해서는 송곳과 사포 등으로 한 세월 동안 삽질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서 주문 제작을 하기로 했다.
싱기버스에서 캐논 바디용 캡의 3D 도면을 검색하고 다운받아서 윈도우 3D builder로 다듬어 주면 된다.
참 쉽죠?
3D 프린팅 대행업체를 검색해서 주문하고 2 영업일 뒤에 도착 👍
따란~
렌즈 장착. 설계한 16mm 구멍에 딱 맞다. 글루건이나 본드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다만, 저 도색이 생각보다 완전 검은색이 아니고 약간 불투명한 검은색 느낌이라, 렌즈 주변부를 검은색 매직으로 칠해주었다.
그리고 테스트 촬영을 해봤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패 및 그 원인
초점 거리가 10cm인 초접사용 렌즈가 되어버렸다. 저 거리를 넘어가면 아무것도 안 보인단 말이다.
애초에 일회용 카메라는 초점 범위가 무한대 아닌가?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내 생각이 짧았다.
피사체와 렌즈의 거리만 생각했지, 렌즈와 카메라 센서와의 거리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플랜지백(flange back) 또는 플랜지 초점 거리(영어: flange focal distance)는마운팅 플랜지(카메라에 설치된 금속링이자 렌즈의 뒷면)부터 필름판까지의 거리이다. 이 값은 카메라 시스템마다 다르다." - 위키백과 '플랜지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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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방안
DSLR이든 미러리스든, 디지털카메라에서 풀프레임 바디를 사려면 어마어마한 돈을 내야 한다.
최소 백만 단위부터 시작하는 게 풀프레임.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필름 카메라는 풀프레임이다.
왜냐하면 35mm 필름 사이즈가 풀프레임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회용 카메라도 풀프레임 바디란 소리다.
싸구려 저렴이라 풀프레임이라는 개념 자체를 여기에 적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카메라는 1.6배 크롭 바디.
센서가 작아진 만큼 렌즈와의 거리가 줄어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개 같은 양덕들. 어쩐지 쓰는 카메라가 전부 풀프레임이더라.
그래. 돈이 많으면 다 쉽겠지.
하지만 돈이 없는 난 박 터지게 계산을 해야 한다.
1:1.6=X:1,
풀프레임 대비 크롭 센서 면적 X 값은 0.625,일회용 카메라의 플랜지백은 대략 25mm이니까 0.625 X 25 = 15.625 즉,센서로부터 대략 15.625mm만큼 거리를 두고 고정시켜야 제대로 된 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ㅋㅋㅋㅋㅋ내 DSLR의 플랜지백은 40mm가 넘는데,15mm면 셔터에 닿을 거리다...
플랜지백이 짧은 미러리스에 장착해보려 했는데 마운트 어댑터를 끼우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어댑터를 빼면 마운트가 안 맞는다. 울고 싶었다.
아쉬운 마음에 대충 걸쳐놓고 사진을 찍어봤는데
응???
얼떨결에 성공
이제 결과물을 보자
사진 결과물
영상 결과물
결과물에 대한 평가
사진의 화질이나 느낌이 15년 전에 가지고 놀던 토이 카메라 같았다.
싸구려 플라스틱 렌즈가 주는 느낌은,
불량 식품처럼 그것 자체는 좋은 게 아니지만 왠지 땡기고 그리운 느낌이다
사진과 영상만 놓고 보자면 화질의 편차가 심했는데,
이 렌즈를 쓸 땐 1~3미터 정도가 적정 촬영 거리인 듯하다.
약 2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사물은 선명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면 화질이 급감한다.